[일상칼럼]모자무싸 후기-사랑하면 같아지고 싶은 이유

이미지
​ <사랑하면 같아지고 싶은 이유>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 단순히 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조건만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드는 건 아니다. 비슷한 삶의 궤적을 공유하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 모른다. 그 안락함이 주는 평온함이 인간을 덜 불안하게 만들고 덜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진짜 성숙함이 요구되는 순간은 서로의 삶이 변했을 때다. 누군가 더 잘 되거나 누군가 더 넓은 세계로 갔을 때,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각자가 마주하는 삶의 무게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깊이가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 변해버렸을까?"라는 서운함은 곧 관계의 본질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의 크기를 온전히 함께 느끼고 싶다는 치열한 열망이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나 역시 똑같이 공감해 주려면, 나만의 세계를 상대와 맞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식이 자라서 부모와 대등하게 삶의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이자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애틋한 마음과도 닮았다.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어떤 면에서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가'라는 수직적인 이분법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자세히 보면 사실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더 쓰라리고 더 위험하고 더 넓고 깊은 세계를 경험해 보았는가'라는 성장의 차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의 세계에 잠시 발을 맞추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성이 고착된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오랜 시간 지속되기 어렵다. 진정한 교감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나 배려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적 지평이 넓어져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같은 주파수’ 위에 설 때 비로...

[일상 칼럼]AI의 ‘초벌’이 전문가에게 ‘오답 노트’가 될 때

​ 최근 읽은 영국 단편 소설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다. 분명 술을 못 마신다는 인물이 ‘에일 맥주’를 주문하고, 동행은 보드카를 마셨다. 엥? ‘영국은 15도 이하는 술로 안 치나?’ 싶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진저에일(탄산음료)’을 맥주로 오역한 것 같다는 귀띔을 들었다. 순간 무릎을 탁쳤다. 어제 본 다른 작품에서는 “얼굴이 나이에 비해 잘 보존되었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문체가 갑자기 변한 것도 웃겼는데 동안이라는 의미는 전달되긴 됐다. 웃긴 ai 번역은 그나마 잘못 된 걸 인지라도 하지 정말 완전히 잘못 됐는데 완전히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원문과 문단별로 비교해도 아직까지 ai는 거짓말을 잘한다. 문단 별로 지난한 질문하기도 쉽지 않다.  좋은 작품을 찾으려면 플롯과 구성을 먼저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AI 번역의 도움으로 먼저 읽는다. 이 ‘초벌’을 번역가님께 드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작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여쭤본 적도 있지만, 오히려 원문과 대조하며 의구심이 괜히 더 생겨 오류를 잡느라, 문화적 차이로 발생하는 오역일까봐, 그 뒷단의 내용을 팩트체크하느라, 등등 오히려 더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게 될 수도 있다. ai초벌 번역이 오히려 일감만 더 늘리고 번역자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자존심 상하는 결과가 된다는 걸 나도 번역 책 작업을 하면서 상세히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람이 상대방의 일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고 실례를 범하게 된다.  이는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ai로 작업한 파일을 결과물이라며 넘겨준다면, 인쇄 편집 디자이너는 결국 인디자인이나 포토샵/일러스트레이터로 처음부터 다시 따라 만들어야 한다. 그간 일해왔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스스로 수단으로만,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 들어 현타가 올 수 있다. ai가 제대로 생성하지 못한 부분을 수정하고 나노 단위의 노가다를 하고 나면, 차라리 다 ai하지 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상 칼럼] 고전 소설, 현대 번역의 한계

​ 퍼블릭 도메인에 해당하는 고전 단편을 읽다 보면현대 번역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생긴다. 문제는 단순히 단어나 문장이 올드하단데에 있지 않다. 작품이 쓰인 시대의 사회 구조, 계급 의식, 인간관계의 거리감, 서술 방식 자체가 오늘날 독자들의 감각과 다르게 직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소설은 상대적으로 대화체가 많고 장면 전환도 빠르다. 인물의 심리나 관계 역시 행동과 말투 안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고전에는 설명적인 문장이 많고, 계급적 위계나 도덕적 판단이 문장 안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당시에는 자연스러웠던 서술 방식이 지금의 독자에게는 다소 러프하거나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지금의 독자들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계급성과 욕망의 감각이 훨씬 더 세분화되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투, 옷차림, 사는 곳, 소비 취향, 직업, 관계 맺는 방식 속에서 아주 미세한 차이를 읽어낸다. 그래서 과거 작품 속 계급 표현이나 인물 묘사가 머리로는 이해되더라도, 묵독을 통해 문장을 받아들일 때는 투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전이라는 권위의 외투를 두르고 있더라도, 실제 알맹이까지 늘 현재적 감각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이 지점에서 훌륭한 독자는 과거의 사람들의 상징계를 이해하고 지금의 감각으로 치환해서 생각하고 공감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과정은 분명 아니다.  모든 고전이 살아남았다고 해서, 역사성과 문학사적 상징을 걷어냈을 때 작품 자체만으로 현대 문학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고전의 현대 번역에는 분명한 한계가 생긴다. 번역자는 문장을 오늘의 언어로 다듬을 수는 있지만, 작품이 지닌 시대적 감각 자체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지나치게 현대화하면 원작의 질감이 사라지고, 원문에 충실하면 독자와의 거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고전 단편의 현대 번역은 ‘낡은 문장을 새롭게 바꾸는 일’이라기보다, 원작의 시대성을 보존하면서도 오늘의 독자가 ...

[일상 칼럼]AI 시대에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AI의 등장은 적지 않은 무력감을 준다.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이라면 그 감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잘 쓰는 능력’ 자체가 더 이상 고유한 경쟁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글을 쓴다는 일은 낚시에 비유할 수 있다. 물가에 서서 기다리고, 서성이고, 때로는 허탕을 치면서도 결국 단어와 문장을 건져 올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는 분명한 쾌감이 있다. 적확한 단어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들인 시간과 고민이 문장으로 응집되고,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생기는 감각이다. 문제는 그 낚시를 AI가 더 효율적으로 해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더 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문장을 안정적으로 만들어낸다면, ‘나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불안은 글을 쓰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 번역자, 편집자까지, 창작과 해석의 영역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확산되는 시대적 불안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며, AI를 도구로 활용하는 상태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그 불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보다는, 우선 처리해야 할 일들에 밀려 유예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상태가 길어질수록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지금의 방식이 충분한가, 아니면 다른 기준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 지점에서 기준은 조금 달라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쓰는가가 아니라, 왜 쓰는가라는 질문이다. 더 뛰어난 도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여전히 글 앞에 서 있는 이유를 묻는 일이다. 낚시의 성과가 아니라, 그 물가에 서 있는 이유가 기준이 되는 셈이다. 어떤 문장은 기다림과 서성임, 망설임 같은 비효율적인 시간 속에서만 길어 올려진다. 그 문장은 단순히 잘 쓰인 결과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 통과해온 질문의 흔적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글은 완성도뿐 아니라, 발화의 주체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읽히게 ...

[아트 칼럼]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깃발: 뱅크시의 조각작품 <깃발에 눈이 먼(Blinded by the Flag)>

이미지
​ 편견과 고정관념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인지적 틀이 필요하다. 가장 보편적인 틀이 편견과 고정관념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추상적인 도식인  고정관념 이 개별 주체에게 투영되는 게  편견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흑인은 춤을 잘 출 것’이라는 생각이 막연한 고정관념이라면, 그 관념을 잣대 삼아 어떤 흑인에게 춤 춰보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편견이다.  결국 편견이란, 각종 데이터를 나름 종합해, 머릿속에만 머물던 관념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특정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는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  깃발이라는 인지적 지름길  인간이 본능적으로 편견을 갖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생존을 위한 효율성  때문이다. 우리 뇌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이며, 모든 타인을 매번 백지 상태에서 탐구하는 건 인지적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다. 편견은 타인을 빠르게 분류하고 판단하게 함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더 많은 관계를 신속하게 정립할 수 있도록 돕는 지름길 역할을 수행한다. 편견의 진화  문제는 이 효율적인 도구가 확장성을 가질 때 발생한다. 개인의 파편화된  편견 들이 모여 집단의 견고한  신념 이 되고, 그 신념이 체계화되면 거대한  이념 으로 탈바꿈하는 경우, 이런 이념은 더 이상 효율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 간의 경계를 긋고 상대를 타자화하며, 끝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 된다. 뱅크시의 작품 속 남성을 덮친 거대한 깃발처럼, 이념은 개인의 시야를 가린 채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자각 뇌의 가소성 측면에서 인간은 편견이라는 틀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러나 그 틀이 자신의 눈을 완전히 가려버린다면, 우리는 자신이 나락을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신념...

[도서리뷰] 03_옷에 사랑이 깃들다 — 《엄마 박완서의 옷장, 그리고 나의 옷 이야기》를 읽고

이미지
  “옷은 많은 느낌을 말해준다. 그 당시의 시간과 내력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궁색함과 어색함과 허세와 부와 명예와 권력을 말해주기도 한다.” — 28p. 발췌, <엄마 박완서의 옷장, 그리고 나의 옷 이야기> 중에서 | 호원숙 지음 === 물건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의 삶에 관여해왔다. 마음이 깃든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명품백처럼 나를 과시하기 위한 액세서리가 되기도 한다. 반지나 꽃다발처럼 말 대신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 종류만큼이나 담길 수 있는 의도도 다양하지만, 그중 의식주의 ’의(衣)’를 차지하는 옷은 인간의 정신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물건이 아닐까 싶다. 패션을 다룬 책은 넘쳐난다. 유명 디자이너의 철학을 조명하거나, 옷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읽어내는 책들도 많다. 그러나 옷에 스민 어머니의 사랑과 기억을 이토록 수수하고 따스하게 써내려간 책은 드물다. 더구나 그 어머니가 <나목>으로 시작해 한국 문학의 “거목”이 된 박완서 작가라는 사실은, 이 책을 한층 더 각별하게 만든다. 어머니가 남긴 옷을 보며 글을 써 내려 갔을 딸 호원숙 작가. 손때 묻은 원단의 결을 더듬고 빛바랜 사진 속 싱그러운 엄마의 미소를 보며 많이 울었으리라. 작지만 단단히 여민 옷매무새를 들여다보며 어머니의 생전 말소리가 들렸으리라. 박완서는 재봉틀로 손수 옷을 짓기도 하고, 남은 자투리 천조차 버리지 않았다. 마치 파울 클레의 그림처럼 조용한 음악을 천으로 남겼다. 낡은 실을 다시 다듬어 아이들에게 입혔고, 그 리폼된 옷 한 벌 한 벌에는 ‘아껴 쓰는 마음’과 ‘곱게 입히고 싶은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그 옷들은 사랑의 증거였다. 나는 물건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사람은 저마다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에 그것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깃들어...

14_ep. 프란츠 카프카 「단식예술가」 - 왜 우리는 굶주림에 매달리는가?

이미지
프란츠 카프카 「단식예술가」 - 굶주림의 쓸모 😃 안녕하세요, 관찰자 미스 브릴(Miss Brill)입니다. 이 블로그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의 기묘한 행동과 심리를 분석하여 우리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예술가」의 소설 속 주인공 '단식예술가'입니다. 💡 알림: 본 에피소드에서 분석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단식예술가」는 《저 사람은 왜 저럴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단편 내용: 단식예술가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 단식을 시작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굶주림을 통해 대중의 시선과 인정을 갈구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단식 능력을 예술적 재능이라 믿으며 극한의 고립을 자처하는 그의 모습은 현대인의 근원적인 결핍을 상징합니다. 단식예술가의 기묘한 심리와 우리 모두가 가진 '존재의 증명과 집착'에 대해 철학자 A와 나눈 날카로운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출연🎙️ 미스 브릴 x 철학자 A : 인물 심리 토론] 미스 브릴: 단식예술가의 극단적 행위 속에서 타인의 시선을 먹고 사는 연약한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는 관찰자. 철학자 A: 단식을 '공백을 먹는 행위'이자 사회적 노동 윤리 속에서 의미를 찾는 실존적 투쟁으로 해석하는 분석가. 미스 브릴 :  단식예술가의 이야기를 보면 참 묘해요. 단순히 안 먹는 게 아니라, 사실은 타인의 관심을 먹고 있는 것 같거든요.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아버지(관습, 규율, 문화 등)나 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백을 먹는"* 셈이죠. *라캉이 한 말--> “거식증 환자는 먹지 않는 게 아니라 ‘없음’을 먹는다” 인데, 여기서는 의역해서 "거식증은 공백을 먹는 것이다"로 표현 철학자 A :  맞습니다. 그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서 안 먹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남들은 그렇게 오...